相爱相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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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07/사이버오로] 이·세·돌, 그 푸르디푸른…

교선생 2019. 12. 2. 17:59

작은 마음의 여유가 세상을 바꿔놓는다.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놓은 것이겠다. 지나는 길에 늘 있었을 개나리며 진달래의 아리따운 빛깔이 처음인 듯 방울방울 눈에 듣는다. 아하, 봄. 이제야 신록의 계절이 왔음을 깨닫느니….

달리는 차창으로 가로수를 본다. 매연과 공해에 시커멓게 죽어가던 가지가지마다 연초록의 생명이 움터 오르고 있다. 자연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으로 세상을 망가뜨릴 때 그 한쪽에서 묵묵히 치유하고 복원시키는 생명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눈길이, 가로수 높은 가지 사이의 새둥지에 닿을 때 가슴이 벅차 오른다. 우리 스스로 망가뜨린 것이라는 손톱만큼의 죄의식조차 없이, 그저 떠나고 싶어하는 이 도시에 아직도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둥지를 박차고 푸른 하늘 높이 날아오른 새 한 마리를 바라보다 문득, 콧잔등이 시큰해진 이유는 투명한 햇살 때문이었을까. 나는 모르겠다.

 


하루가 지난 저녁 6시.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제2회 KT배 마스터즈기전 결승1국이 펼쳐졌다. 결승무대의 주인공은 지난해 상금랭킹 1위 유창혁과 이 시대 최고의 풍운아 이세돌. 유창혁에게는 '2003년 무관탈출'과 '대 이세돌 타이틀전 3연패(배달왕기전, KTF배, 후지쯔배) 설욕'이라는 절대목표가 있고 이세돌에게는 국내 최고상금 양대타이틀(LG정유배, KT배) 석권이라는 상징적 과제가 있다.

대국 개시 10분 전. 스튜디오 옆 대기실에서 만난 유창혁과 이세돌의 얼굴은 담담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창혁의 얼굴에서는 낙관적 기질과 승부의 연륜으로 빚어지는 여유가, 이세돌의 얼굴에서는 봄 햇살처럼 맑고 투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팽팽한 긴장과 투지를 예상했던 관측자로서는 조금 당혹스러웠으나 마음은 더 즐거워졌다. 그 자리에서 느낀 '승부 그 이상의 무엇'이 모호한 나만의 감정일지라도….

KT배는 제한시간 20분에 30초 초읽기 3회의 속기전. 이런 스피드대결에서는 탁월한 감각과 빠른 수읽기가 절대조건인데 두 사람은 감각에 관한 한 세계최고로 꼽히는 천재형이다. 대국은 스피디하게 진행됐다. 때이른 우상귀의 박투(搏鬪). 도발적인 백(이세돌)의 응수타진으로부터 발화된 승부의 불길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흑(유창혁)의 반발에 부딪쳐 우상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거센 불길이 잡히는 순간 사실상 승부도 끝났다.

'살쾡이의 발톱 같다'는 이세돌의 공격은 그 표현 이상으로 매서웠다. 정확하게 흑의 급소를 찌르는 손길은 명료하고도 단호했다. 흑의 터전이었던 우상귀는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견고해 보였던 성(城)은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렸고 검은제국의 병사들은 모두 장렬한 옥쇄(玉碎)를 택했다. 182수 끝 백 불계승. 이세돌, 제2회 KT배 마스터즈기전 결승3번기 제1국 승리.

대국종료 후 바로 검토가 이어졌다. 승부처였던 우상귀로 두 기사의 손이 빠르게 오가고 치열한 눈빛이 교차된다. 승자도 패자도, 표정은 지극히 담담하다. 그러나 어찌 그 내면의 빛까지 같으랴. 대기실에서 검토에 열을 올렸던 동료들은 몇 가지 의문만 제시하고 조용히 물러서서 말을 아낀다.

프로들은 국후 검토할 때 일일이 돌을 늘어놓지 않는다. 전장(戰場)의 잔해들을 한쪽으로 쓸어 치우고 그저 이곳, 저곳 손가락으로 짚는 정도로 충분하다. 마치 고승들이 주고받는 선문답(禪問答) 같다. "여기선 이렇게 받는 정도인 것 같다". "그건, 굴복 아닌가?" 승자의 말투는 단호하나 조심스럽고 패자의 그것은 나직하지만 격렬함이 실려 있다. 성이 함락되고 병사들이 옥쇄하는 장면이 재현될 때 승자의 눈은 투명하게 빛나고 패자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는다. 그 위로 스치듯 사라지는 슬픈 별 하나….

 


검토가 끝나고 저녁자리가 만들어졌다. 관전자들에게, 패자의 정서(情緖)는 어렵다.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룬다면 그건 대체로 승자 쪽이다(실은, 승패와 상관없이 약속된 자리이기도 하다). 약간의 술을 반주 삼은 유쾌한 저녁식사. 이 자리에는 KT배 관전기자이기도 한 문용직 5단과 승자의 가족 허기철 씨가 합석했다.

이세돌은 예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물어보니 LG배 세계기왕전을 치르면서 몸무게가 4kg이나 줄었다고 한다. 1.72m의 키에 55kg의 체중인데 더 말라 보이는 것은 단기간의 스트레스에 의한 체중감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큰 승부가 주는 압박감과 고통은 당사자들만이 안다.

소주 한 잔의 취기가 승자의 자신감을 북돋운 것일까. 묻기도 전에 승부에 관련된 말들을 술술 털어놓는다. "타이틀을 따내서 얼마나 기쁘냐, 앞으로의 목표가 뭐냐,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유는? '이겨서 특별히 기쁜 것도 없고 특별한 목표도 없기 때문'이란다. "물론, 기쁘기는 기쁘죠. 타이틀을 땄는데 왜 안 기쁘겠어요. 그렇지만 그때뿐입니다. 목표는 정말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정말 목표가 없을까? 거짓말이다. 아니, 그렇지만 이세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니 어렴풋 실체가 잡힌다. 이세돌도 타이틀을 따내면 기뻐한다. 이창호라는 확실한 목표도 있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다, 목표가 없다'고 했을까. 이세돌의 일상의식 속에는 승리의 기쁨이나 확실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이라는 호수 깊이 잠겨 있다가 어느 순간 돌발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한 마리 물고기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일상의 의식 속에서는 물고기를 떠올리지 못한다.

 



이세돌은 '이겨서 기쁜 게 아니라 지는 게 고통스러워서 이긴다'고 말한다. 승리의 기쁨은 찰나에 사라지고 패배의 아픔은 오래오래 가슴을 짓누른다는 것. 20세의 보통 청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극심한 승부의 고뇌를 맛본 정상의 프로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오래 전, 지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사로 꼽히는 조치훈도 이런 말을 했다. "타이틀획득의 기쁨은, 획득하는 그 순간 모두 사라집니다. 그 뒤에 오는 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허탈감입니다. 기쁨은, 타이틀전에 뛰어들어 한판, 한판 이겨나가고, 도전하고 타이틀을 따내기까지의 과정에 있는 것이지 타이틀획득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상한 건, 조치훈에게서 느껴지는 빛깔이 우울한 회색인 데 반해 비슷한 말을 꺼낸 이세돌에게 느껴지는 빛깔은 맑고 투명한 푸른색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몰입의 순수성, 그 때문일까. '나는 지금보다 2년 전이 더 강했다. 자신감도 그때가 더 컸었다. 2년 전 LG배 때 이창호 9단을 꺾었으면 훨씬 더 커져 있지 않을까?'라는 독특한 자기비관이 오히려 그 어떤 자신감의 표현보다 긍정적으로 들린다.

이세돌은 분명 비범한 승부사다. 세계가 뒤를 쫓는 최강자 이창호마저 베어 넘긴 서슬 푸른 한 자루의 칼이다. 바둑판을 쏘아보는 눈빛은 먹이를 쫓는 표범과 같고 집요하게 급소를 노리는 손길은 그 발톱처럼 표독스럽다. 그러나 바둑판을 떠난 이세돌은 20세의 보통청년이다. 아니, 특이하게 오므라지는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열(齒列)을 살짝 내보이는 토끼 같은 웃음은, 그리고 동그란 두 귀는 천진한 아이와 같다.

정상의 치열한 승부를 눈이 푸른 동승(童僧)에게 듣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빨리 흘러간다. 어느새 3시간쯤이 훌쩍 지나버린 늦은 밤. 큰 승부 뒤의 피로에 약간의 취기를 얹었음에도 '어머니가 비금도로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들과 밤 벚꽃놀이를 가기로 했다'며 일어서는 청년의 얼굴은 여전히 밝고 따뜻했다.

일쑤의 뒤풀이를 더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휘파람을 불었다. 세상은 아직 살아볼 만한 것. 초록의 포연(砲煙)이 자욱한 산등성이마다 작렬하는 선홍의 철쭉 포화, 계곡마다 흐드러지는 개나리의 노란 물살…. 밤새 시인의 전쟁 같은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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