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爱相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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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5/LG배세계기왕전] 이세돌,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교선생 2019. 3. 17. 20:35



소위 초1류 프로들의 승부사로서의 자존심은 일반 팬들로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강하다. 그중에서도 이세돌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정평이 있다. 타고난 재주에 투철한 승부기질이 합쳐져 최고 승부사 이세돌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이세돌이라도 무한정 질주는 불가능하다. 신이 마련한 세월이란 장치 때문이다. 중요한 판에서 연속으로 무너진 것은 세월이란 이름을 지닌 자연의 섭리다.


패배가 오죽 힘들고 괴로웠으면 은퇴 또는 휴직까지 떠올렸겠는가. 프로기사는 일종의 예술가적 측면도 있어 나이가 든다고 굳이 은퇴해야만 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가 은퇴를 입에 올린 것은, 자신의 눈높이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지 못하는 이상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기사생활을 유지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한 명의 초1류 기사인 김지석 9단은 언젠가 필자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는 바둑이 내 인생의 전부였지만 앞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대회에 출전하는 기사는 되기 싫다. 어느 시점부터는 바둑 아닌 다른 재미있는 분야 공부도 해보고 싶다.” 놀랍게도 그가 이 발언을 한 시점은 무려 6년 전으로,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2013년 4월, GS칼텍스배 결승서 이세돌을 3대0으로 완파한 직후였다.


필자는 이세돌의 이번 폭탄 발언과, 6년 전 김지석의 했던 말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둘 모두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승부행위를 계속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세돌은 갑자기 찾아온 고령화(!) 슬럼프에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변신의 필요성을 공개한 것이고, 김지석은 아직 겪지 않은 자신의 훗날 모습을 내다보고 미리 생각을 밝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012년 12월 상하이. 제17회 삼성화재배 결승서 이세돌이 구리를 2대1로 꺾고 우승했다. 그 이튿날 필자와 이세돌 단 둘이 마주앉아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세돌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내 위치가 얼마나 갈 걸로 보세요? 내 생각엔… 10년쯤은 이어지겠죠?” 항상 자신감에 차있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이세돌이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최면일 수도 있었다. 필자는 그런 그의 자신감이 든든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다짐이 지켜질지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공교로운 일이다. 이세돌은 그 대화 이후 세계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메이저 대회에선 한 번도 우승을 추가하지 못했다. 두 차례 TV아시아선수권을 제패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는 게 고작이었다. 이 무렵부터 이세돌을 향한 ‘바둑연령 시계’가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정말 몰랐다.


뛰어난 기량을 갖춘 승부사일수록 패배 이상으로 아픈 것은 없다. 초1류 프로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그 살을 에이는 아픔을 달랜다. 이세돌은 바둑에 패할 경우 상대를 붙잡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복기를 계속한다. 물론 그의 불타는 탐구심이 첫째 이유지만 자신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렵게 상대를 돌려보낸 뒤엔 밖으로 나가 혼자 무한정 길거리를 걷는 게 그만의 방식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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