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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爱相杀
저마다 각양각색이다. 이세돌 9단은 "진 아픔은 이겨서 푸는 것이 제일 낫다"고 말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다만 기약 없는 해소법이다. 상대를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또 설욕한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은 독한 술로 쓰라린 속을 달랜다. 예전엔 집에서 마시는 일이 많았는데 최근엔 친한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린다. 수년 전 아내와 딸(유학)이 캐나다로 떠나면서 기러기 아빠가 됐을 때엔 집에서 혼자 마시면 처량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 김지석 9단에겐 이런 일이 있었다. 신예기사 시절인데 LG배 본선에서 중국의 스웨에게 진 후 분에 못 이긴 나머지 숙소 침대의 베개에 얼굴을 뭍고 울분의 소리를 토해 냈던 일화.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옆방은 물론 숙소동에 찌렁찌렁 울릴 정도였던 것. 배..
소위 초1류 프로들의 승부사로서의 자존심은 일반 팬들로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강하다. 그중에서도 이세돌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정평이 있다. 타고난 재주에 투철한 승부기질이 합쳐져 최고 승부사 이세돌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이세돌이라도 무한정 질주는 불가능하다. 신이 마련한 세월이란 장치 때문이다. 중요한 판에서 연속으로 무너진 것은 세월이란 이름을 지닌 자연의 섭리다. 패배가 오죽 힘들고 괴로웠으면 은퇴 또는 휴직까지 떠올렸겠는가. 프로기사는 일종의 예술가적 측면도 있어 나이가 든다고 굳이 은퇴해야만 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가 은퇴를 입에 올린 것은, 자신의 눈높이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지 못하는 이상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기사생활을 유지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한 명의 초1류 기사인..
▲ 제가 게시판에 글쓴 후에 이 post가 처음이에요. 김지석사범 마음에 너무 고마워서 안올릴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아직 Facebook에서 글 많이 올리는 것은 부담이 돼요.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and I'm happy that finally there is someone I can respect among the top Korean pros as well. 결국 하루 있다가 아빠는 엄마한테 전화했죠. (사실 두 분 2년 전에 이혼했거든요). 그런데 아빠가 너무 걱정하니까 전화가 왔대요. 엄마는 너무 걱정하는 성격인 아빠한테는 좀 더 기다렸다가 얘기했어야 했다고 했어요. 어쨌든 엄마랑 얘기하면서 엄마한테 김성룡한테 연락은 꼭 올 거라고 금요일에 무슨 모임도 있으니까 얘기할거라고 했더니, ..
http://www.cyberoro.com/column/column_view.oro?column_no=3963&group=37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김정열 원장에게 배우던 지석은 오규철 9단에게도 10개월가량 집중조련을 받았다. 오규철 9단은 “속도나 기재를 타고났다. 수를 아주 빨리 보고 사활 묘수가 밝다”며 한마디로 “굉장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스승 임선근 9단이 ‘참 안 는다'고 한탄할 정도로 지체를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연구생이 되긴 하였으나 서울에서 2년 넘게 있는 동안 지석의 바둑은 연구생 8~9조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수준에 그쳤다. 자연 신동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졌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현현연구소에서의 수업은 주로 연구생 형들이랑 바둑을 두는 형식이었다..
http://www.tygem.com/news/news/viewpage.asp?pagec=3&seq=16843&gubun=0&igubun=&find=&findword= 89년생 동갑나기 김지석과 강동윤은 어린시절부터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그들을 지도한 권갑용은 이렇게 회상한다. "광주에서 신동났다며 유명해진 7살 꼬마 김지석을 처음 만났다. 당시 강동윤의 존재는 없었는데, 그 후 3~4년이 흐르자 강동윤이 혜성처럼 등장해 전국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초등학생이던 둘은 어려도 서로를 확실히 의식했다. 본인의 성적 만큼 상대의 기록과 성적을 의식했고, 서로에게 질 때면 어느 때보다 우울해 했다. 때문에 실력이 약했어도 둘이 만나면 도장의 선배들이 그들의 대결을 둘러싸고 구경했다. 이세돌도 그 중 한 명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