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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爱相杀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405100083 사람들은 나를 「名조련사」라고 부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名조련사 맞느냐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혼자 웃고 만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프로기사를 많이 배출하고, 그들이 프로에 가서도 좋은 성적을 내니까 하는 말일 텐데, 실제로 재주 있는 아이들이 들어와 열심히 공부한 결과이니 구태여 겸손을 과장할 것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 공로가 아닌데 겸손을 보이는 것은 우습다. 조련의 비법을 묻는 사람도 많다. 비법이랄 것이 없으니 감출 것도 없다. 위의 얘기를 반복하면 된다. 다만, 내 삶의 역정이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그런 것은 있다. 나처럼 밑바닥 생활을 오래 한 사람..
https://news.joins.com/article/2824677 한데 이들 유망주의 대부분을 키워낸 권갑룡 7단 역시 “박정환이야말로 이세돌의 천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강동윤은 감각이 발군이고, 윤준상은 창의적이며, 이영구는 길들지 않은 야생마다. 백홍석은 속도감과 전투력이 뛰어나고, 김지석은 바둑의 결이 최고다. 그러나 이들은 장점이 곧 약점이 되는 경향이 있고 기질적으로 독하지 못한 점이 있다. 박정환은 타고난 근성이 대단해 조훈현-이세 돌의 계보를 잇는 가슴 서늘한 승부사 기질이 느껴진다. 스라소니 같은 이세돌에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을 지닌 최철한을 합해 반으로 나눈 것이 박정환이라고나 할까.”
1편 http://www.tygem.com/news/news/viewpage.asp?pagec=1&seq=15169&gubun=&find=&findword=2편 http://www.tygem.com/news/news/viewpage.asp?pagec=1&seq=15171&gubun=&find=&findword= - 백 9단의 우승으로 비씨카드배가 해피엔딩이었지만, 사실 8강전까지 른바 중국의 준비된 바둑돌 90後 세대들이 훨훨 날아 비난이 거셌죠. 이전부터 느낀 부분이지만 앞으로도 중국이 너무 막강하겠죠. - 1인자를 많이 배출한 지도자로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안이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현재 한국 상위랭커의 주축인 1980년대 생과 1990년대 이후 생들의 문화도 많이 달..
http://www.cyberoro.com/column/column_view.oro?column_no=3963&group=37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김정열 원장에게 배우던 지석은 오규철 9단에게도 10개월가량 집중조련을 받았다. 오규철 9단은 “속도나 기재를 타고났다. 수를 아주 빨리 보고 사활 묘수가 밝다”며 한마디로 “굉장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스승 임선근 9단이 ‘참 안 는다'고 한탄할 정도로 지체를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연구생이 되긴 하였으나 서울에서 2년 넘게 있는 동안 지석의 바둑은 연구생 8~9조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수준에 그쳤다. 자연 신동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졌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현현연구소에서의 수업은 주로 연구생 형들이랑 바둑을 두는 형식이었다..
http://www.tygem.com/news/news/viewpage.asp?pagec=3&seq=16843&gubun=0&igubun=&find=&findword= 89년생 동갑나기 김지석과 강동윤은 어린시절부터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그들을 지도한 권갑용은 이렇게 회상한다. "광주에서 신동났다며 유명해진 7살 꼬마 김지석을 처음 만났다. 당시 강동윤의 존재는 없었는데, 그 후 3~4년이 흐르자 강동윤이 혜성처럼 등장해 전국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초등학생이던 둘은 어려도 서로를 확실히 의식했다. 본인의 성적 만큼 상대의 기록과 성적을 의식했고, 서로에게 질 때면 어느 때보다 우울해 했다. 때문에 실력이 약했어도 둘이 만나면 도장의 선배들이 그들의 대결을 둘러싸고 구경했다. 이세돌도 그 중 한 명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