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爱相杀

[050202/엠게임바둑] <구리, 왕시, 그리고 이세돌> - 삼성화재배 준결승전을 보고 . 본문

스크랩

[050202/엠게임바둑] <구리, 왕시, 그리고 이세돌> - 삼성화재배 준결승전을 보고 .

교선생 2020. 1. 3. 09:53

 

이세돌 9단에겐 저항적인 기운이 흐른다. 어딘지 외로워 보인다. 그는 어떤 현상이나 상황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말하고 생각이 다르다면 선배든 누구든 망설임없이 충돌한다.

 

이세돌은 결승전 상대가 누구이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저우허양”이라고 대답했는데 그 이유를 묻자 “……바둑도 왕시가 강한 것 같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세돌은 아주 영리하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강하고 화끈하게 행동하면서도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며 움직인다.

몸은 호리호리하고 약해 보이지만 이세돌은 표범과 같은 동물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고양이과의 전형을 느끼게 해준다. 

 

구리(古力) 7단은 몇 가지 점에서 이세돌과 비슷하고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다르다.

예를 들어 호연지기가 강한 것은 둘이 비슷하다. 화끈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구리는 열혈청년이지만 근본적으로 체제에 순응적이다.

삼성화재배 준결승전을 앞둔 구리는 “나라를 위해 두겠다”고 말하며 가슴을 폈다. 그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순진무구한 청년 병사처럼 조국을 위해 멋진 싸움을 벌일 꿈과 각오에 부풀어 있었다.

구리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 친구를 좋아하고 함께 식사하며 건배하기를 즐긴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희생은 언제든지 자청할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관을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왕시(王檄) 5단은 세계대회 결승에 올라갔으니 중국 승단제도에 따라 곧 8단이 될 것이다. 우승한다면 9단이다. 그는 준결승전에서 저우허양(周鶴洋) 9단과의 두 판을 깨끗이 이겨 2대 0으로 승부를 끝냈다.

왕시와 저우허양은 두 사람 모두 지극한 모범생의 분위기를 풍긴다. 구리가 장난스럽고 이세돌 역시 짓궂은 데가 있어 보이지만 왕시와 저우허양은 마치 승려와 같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자세도 반듯하고 웃음조차 조심스럽다. 대국 때 허리를 비틀어 턱을 괴곤 하는 이세돌이나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 구리와는 영 다르다.

 

(1)

이세돌은 파격적인 사람이지만 동시에 예민한 사람이다. 그는 잠을 푹 들지 못하고 입맛도 까다롭다.

이세돌이 대국하고 있을 때 검토실에서 “어제 늦게까지 잠을 안자던데요.” 또는 “새벽 3시

에 깨워 일어나 같이 있었어요.“하는 소리를 듣곤 한다.

 

대국장인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은 이름 그대로 교육장이다. 회사?殆便湧? 그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따라서 식당도 각자 식판을 들고 셀프 서비스를 해야 하고 끝나면 빈 그릇을 치워야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예전에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 9단이 불평을 많이 했었다.

가만보면 마샤오춘도 매우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이기에 어딘지 어색한 대국장에 거부감이 심했을 수 있다.

대국자들은 물론 셀프 서비스는 아니다. 식단도 선수들의 경우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세돌은 이곳의 식사가 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세돌은 이번 준결승전 3판을 두는 동안 이곳에서 한번만 식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 번은 수저를 들어 한번 국물을 떠보다가 그냥 놓고 나가버렸다.

연수원 밖은 숲으로 둘러 싸여있어서 식당을 찾으려면 멀고 힘들다. 그러니 어떻게 점심을 해결했는지 통 알 수가 없다. 

대회를 진행하는 측에선 꽤 미안하고 골치 아픈 부분일 것이다.

 

구리는 한국음식을 잘 먹는다. 체격도 좋고 식욕도 왕성하다. 연수원에서 주는 한국음식도 물론 잘 먹었다.  

 

(2)

준결승전, 이세돌 대 구리의 1국은 한참 대형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구리 쪽에서 결정적인 착각이 튀어나와 일거에 승부가 났다. 화끈한 성격 그대로 두 사람은 대단히 바른 속도로 바둑을 두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쪽에서 50여수 진행될 즈음, 저쪽 저우허양 - 왕시의 대국은 돌 몇 개 놓고 장고에 빠져있었다.

 

2국에선 더욱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이세돌이 던져버린 것이다. 9시 반에 대국 시작되고 12시 반이면 점심시간이다. 말하자면 양쪽의 소비시간이 3시간도 되기 전에 바둑이 끝난 것이다. 세계대회의 주요 대국, 즉 준결승 이상의 판에서 점심시간이전에 대국이 끝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1대 1 상태에서 3국이 열린 것은 11월 19일. 폭풍과 화염으로 뒤범벅된 난전을 예상했던 사람들이 많았건만 막상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구리는 몹시 긴장한 듯 초반 무거운 행마가 연속 뛰어나왔고 그런 수들에서 상대의 상태를 알아챈 이세돌은 가벼운 아웃복싱으로 형세를 리드하다가 멋진 묘수 한방으로 귀를 잡아 승세를 굳혔다.

 

‘사상 최강의 아마추어’로 불리는 구리 7단은 순수하고 용기있는 청년이지만 아마도 전날 잠을 설쳤던 것으로 보인다. 잠을 푹 들지 못하는 것은 꼬박 밤을 새는 것보다 못하다는 설(?)이 있다. 밤을 새면 뇌의 힘이 약하긴 해도 칼끝처럼 날카로워진다.

잠을 설치면 뇌가 무거워지고 윤활유가 떨어진 자동차처럼 삐걱거린다. 둔하고 생기없는 행마가 나와 버리는 것이다.

구리의 바둑은 이세돌과 전투를 벌여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했으나 부담감을 떨쳐내는 정신력은 아직 단련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에 비하면 이세돌은 큰 승부에 강한 청년이었다. 

 

(3)

결승전은 결국 이세돌과 왕시로 낙착되었다. 고독한 반항아의 이미지를 지닌 이세돌과 밸런스가 잘 잡힌 모범생 왕시의 대결은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카드다. 

 

왕시의 바둑은 결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특성을 지녔다. 그는 싸우기보다는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간다. 상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때도 여간해서 결정타를 던지지는 않는다.

이런 바둑과 이세돌이 맞붙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저우허양은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리스트로 왕시와 닮은 구석이 많은데 그는 이세돌의 사나운 흔들기에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이세돌은 왕시보다는 저우허양이 좋겠다고 했다. 왕시는 어딘지 캥기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실상 구리와 이세돌의 준결승전은 결승전이나 한가지였다. 네임밸류에서 이 두사람은 왕시나 저우허양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러나 큰 대회의 결승전이란 사람을 금방 달라보이게 만든다. 일찍 탈락했더라면 그냥 신예기사에 불과했던 왕시가 늠름하게 결승전에 나타나자 그의 모습이 완연히 달라 보인다.

이런 느낌은 이세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결승전은 좋은 승부가 될 것이 틀림없다. 

 

http://baduk.mgame.com/column/?menu=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