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爱相杀
[200205/일요신문] [인터뷰] 꼬마 이세돌과의 날카로운 추억…‘속기 달인’ 정대상을 아시나요? 본문
[일요신문] 1991년 여름 늦은 오후, 권갑용 바둑도장. 원장실에 들어가니 웬 꼬마가 혼자 비스듬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뭔가 읽고 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나?” “외출하셨어요.” “다들 리그전 두던데 넌 왜 안 두니?” “밖에 제 상대가 없어서 쉬는 중이에요.” “그래? 그럼 나하고 둬 볼래?” “그런데 누구세요?” “응? 권 사범님 친구야. 나도 프로거든.”
테스트 겸 두 점을 놓으라고 했는데 싫은 표정이 역력하다. “그럼, 내가 특별히 한 판만 이기면 치수 고쳐줄게. 한번 잘 둬봐.” 당시는 혈기왕성한 30대, 빠른 손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같은 템포로 두는데 바둑은 전혀 안 밀린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속도’에서 맞짱을 뜨니 승부사의 자존심이 끓어올랐다. 알고 있던 초강수를 다 동원해 끊고 싸워 힘으로 눌러버렸다.
대마가 잡히고, 돌을 거둔 아이는 마치 교통사고라도 당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했다. “너 참 잘 두는구나. 운이 좋았어. 여기서 실수 안 했으면 내가 졌네”라고 위로해줬는데 단 한마디 변명이 없다.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게 아주 묘한 느낌이었다. 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해서였을까. 조금 있다 권 원장이 돌아왔다.
“어휴, 방금 여기서 두 점으로 한판 뒀는데 아주 잘 두더라고. 꼬마애가….” “헉, 어떻게 두 점을 접었어? 여기 프로사범들에겐 선으로 두는데. 며칠 전 해태배에서 우승한 이세돌이라고 해.” “그런가? 이해가 안 가면 1만 원 후원해라, 다시 둬 줄게.” 다시 소년과 마주했고, 흑돌 두 개를 반상에 올렸다. 얼마 안 되어 지폐 한 장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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