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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22/사이버오로]'현장은 살아 있다' 취재의 뒤편

교선생 2020. 2. 17. 11:18

▲ 프로기사는 모두 두 얼굴을 지녔다. 승부사의 얼굴은 그들이 모르는 순간에 나타난다.

 

바둑팬 여러분.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바둑 기자로 현장을 뛰면서 그동안 건조한 뉴스로만 만났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단지 '지구에 사는 한 종의 생명체'로서 취재 현장에서 갖는 느낌ㆍ풀어놓지 못하고 지나쳤던 생각들을 가벼운 기분으로 펼쳐 봤습니다. 뉴스 고유의 마른 글투에서 힘을 쫙~ 빼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썼으니 편안하게 봐 주시기 바랍니다.

 

구리의 고뇌

 

한·중·일의 프로기사 누구나 실력을 인정하는 구리 9단. 그의 얼굴엔 진지한 표정이 많다. ‘구리 9단이 엄청난 개그를 해 좌중이 박장대소하게 했다’는 얘기는 잘 못 들어 본 것 같다. 언젠가 국가를 위해 바둑을 둔다고 말한 적이 있다(아나키스트인 내 후배는 이 말을 몹시도 싫어한다.) 국가의 안위와 명예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처럼 그렇게 바둑을 두는 걸까.

때때로 구리 9단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내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 오롯이 들어오면, 짧은 순간이지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저렇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이런 것이 승부인가’ ‘얼마나 괴로울까’ ‘다른 괴로움과는 어떻게 다른 괴로움일까’ .

무척 초조해 보이기도 한다. 한쪽 손을 펴서 바닥을 드러낸 뒤 다른 쪽의 손가락으로 긁기도 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천장으로 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본 중 그가 가장 괴로워하던 모습은 지난봄 이세돌 9단과 대국할 때였다. 후지쯔배가 열리던 4월이었다. 이세돌 9단의 복귀를 몹시 바랐던 사람의 한 명이었던 구리 9단이다. 당대에 천하쟁패를 할 자는 자신과 이세돌 9단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지만 막상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으니 부담감이 되살아오는 모양이었다.

형세도 나빴다.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이 표정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고, 바둑을 잘 아는 사람이 바둑판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구리 9단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완전히 감싸 쥐고 있었다.

괴로움이란 말보다는 고뇌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안쓰럽기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그가 고뇌에서 탈출한 가운데 바둑을 두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 구리 9단이 승부를 앞두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투혼을 끌어올린다.

 


‘국민 여동생(응? 여동생?)’ 이슬아

스무 살.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깻잎 머리를 할 땐 중학생이라고 말해도 모를 것 같다. 가끔, 더 성숙해 보이는 머리 모양을 하고 오면 머리만 나이 들어 보이고 얼굴은 그대로 앳된 채여서 부조화하다.

귀여운 외모와 강한 펀치력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아마도 이게 많은 팬이 이슬아 초단에게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스승 허장회 9단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이 초단의 최대 강점으로 꼽는다(헛, 이것은 이세돌 9단의 특징이잖아…). 바둑을 막 배우기 시작한 시절에도 이 초단은 ‘책대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세돌 9단은 현대 바둑이 부정하는 변화를 과감하게 들고 나와서는 그 변화도 나름의 일리가 있음을 승리로써 갈파한다. 그처럼 이슬아 초단도 그런 면을 다분히 보여 준다. 후반이 약하다고 본인은 말하는데, 최근 지지옥션배에서 보여준 이 초단의 중ㆍ후반 흔들기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좀체 믿기지 않는 역전을

만들어내는 이 초단의 괴력에 해설자들이 더 당황했다.

여기에 따뜻한 마음씨마저 가미된다면 정말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도 나올 법한데, 이것이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예도 있다. 지방에서 열리는 기전을 취재하던 어떤 기자가 노트북이 고장 나 이걸 고치느라 점심도 못 먹고 끙끙대고 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 초단이 자기 숙소에서 케이크을 갖고 나와 기자에게 주었다고 한다.

신세대답게 카메라에 앞에서 과감한 포즈도 취한다. 과연 스타 기사다(하긴, 요즘 신세대 기사들은 대부분 과감하다).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여자 기사로 계속 성장하기를….

 


살금살금 걸으세요 ‘본선 대국실’

 

주요 기전의 본선을 주로 치른다고 해서 본선 대국실이다. 한국기원 4층에 있다. 하지만 프로기사 수가 200명을 넘어서기 시작한 뒤부터는 본선만 치른다는 개념은 희박해졌다. 예선 대국실에 자리가 모자를 땐 이곳도 이용한다.

세계대회 예선 때 관심이 몰리는 대국은 추려져 본선 대국실에서 치러지기도 한다. 팬들의 관심이 더 몰린다는 이유에서 부담감이 더 들고 그게 안 좋은 내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본선 대국실 대국을 기피하게 되는 기사도 있다고 한다.

사이버오로 기자들은 이곳이 무척 친숙하다. 거의 매일 방문해야 할 때도 있다. 한꺼번에 8명의 기사가 대국할 수 있는 이곳에는 네 대의 컴퓨터가 있다. 실시간 수순 중계용이다. 본선 대국실에 도착하면 기록자가 문제없이 대국을 잘 기록하는지, 기사들의 단위가 틀리거나 흑백이 서로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촬영하는 게 보통의 일과다.

이곳은 축구 경기장이나 복싱 특설링이 아니므로 소음으로부터 최대한의 격리가 필요하다. 대국이 막 시작하면 한국기원 기전 관계자도, 기자들도 기침 소리도 내지 않고 고양이 걸음으로 이동한다.

기자가 가장 곤란을 느낄 때는 컴퓨터나 인터넷 연결에 이상이 생겼을 때다. 정말이지 이런 때는 등줄기에 땀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콩팥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컴퓨터를 건드려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대국자에게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하는 작업은 정말 어렵다.

 

▲ 본선 대국실에서 대국한다는 것은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음을 의미할 때가 잦다.

위 사진은 바둑TV 취재진이 본선 대국실에서 촬영하는 모습이다. 바둑TV 취재진은 이곳에서, 보통 생중계용이 아닌 자료 영상을 담는다. 여러 곳의 기자와 바둑TV취재진이 같이 몰리는 날이면 혼잡하다. 각자의 렌즈 시야 바깥으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번거롭다. 어쩔 수는 없다.

본선 대국실은 액자가 몇 개 걸려 있고 드넓은 창을 커튼이 둘렀다는 특징 빼고는 이렇다 할 변화가 있지 않다. 같은 각도로 이곳 사진을 계속 찍어 사이버오로 뉴스에 올리면 좀 식상할 게 뻔하다. 이것이 기자들의 고민이다. 좁은 이 장소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 새로운 각도를 발견해 내는 궁리들을 한다(사이버오로 바티즌께서는 눈치채셨으리라).

 

▲ 본선 대국실에 일찍 도착하면 서로 근황을 묻게 된다.

 

‘앗 추워라’ 바둑TV스튜디오

 

▲ 서울 성동구 홍익동 바둑TV스튜디오. 2번 카메라가 스튜디오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기원 1층에는 바둑TV스튜디오가 있다. 기사에서 ‘한국기원 1층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제○기 ○○○배에서…’와 같은 문구를 보셨을 것이다. 지금은 공사 중이다. 더 좋은 시설로 옷을 갈아입는다고 한다. 그래서 당분간 분당 스튜디오에서 기전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오는 27일이면 홍익동 한국기원 스튜디오로 주 무대를 다시 옮겨오게 된다.

바둑TV스튜디오 안은 1년 내내 춥다. 천장에 조명이 많아 쉽게 열기가 오를 수 있어서 충분한 냉방을 시킨다. 마른 체격의 여성 계시원들은 더 추위를 타기도 한다. 하긴 몇 시간씩 있으면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카메라는 총 4대다. 좌우에 한 대씩 그리고 가운데 2번 카메라가 있다. 2번 카메라가 대국자와 스튜디오 전면을 비추는 풀샷을 잡아준다. 그럼 나머지 한 대는 어디에 있을까. 당연하게도 천장에 있다. 제일 중요하다. 바둑 프로그램 중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화면은 바둑판 위다.

 

▲ 내 친구다. 형형색색의 숱한 조명의 혼란 속에서 유유히 흰색균형을 잡아 준다. 대국 시작 전 카메라 렌즈에 대고 셔터를 누르면 셋팅이 된다.

 

기자들은 대국 개시 후 약 10분간의 촬영시간을 가진다. 넉넉한 시간이다. 보통은 스튜디오 왼쪽에 가 대기한다. 흑번 대국자의 첫수를 찍기 위해서다. 모든 것에 ‘첫’은 중요한 것이겠지만 이 ‘첫수’에 많은 이들이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중요한지.

 

http://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14422&so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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