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爱相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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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nn/월간조선] 세계바둑 頂上에 오른 10代 소년 李世乭

교선생 2021. 7. 10. 23:13

 劉昌赫 九단 꺾고 후지쓰杯 우승 차지
 
 
  李世乭(이세돌·19)이 마침내 세계 바둑계의 전면에 나섰다. 마치 마이너 리그서 폭발적 타격으로 주목받던 루키가 메이저 리그에 진입하자마자 큼지막한 만루 홈런을 쳐낸 느낌이다. 지난 8월3일 도쿄서 막을 내린 제15회 후지쓰杯 세계 선수권대회 결승서 李世乭 三단이 대선배 劉昌赫(유창혁·36) 九단을 극적인 반 집 차로 따돌림으로써 바둑계는 일대 지각변동기로 돌입할 전망이다.
 
  李世乭의 이번 후지쓰杯 제패로 한국 바둑은 17개 국제대회서 연속 우승이란 신화를 이어갔다. 한국이 국제대회를 제패했다는 것은 별반 뉴스거리도 못 될 정도인데, 그럼에도 이 사건이 국내외서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 최정상권에 「새 식구」가 들어섰다는 점과, 그 새 얼굴이 앞길 창창한 19세 소년이란 점이 그것이다.
 
  세계대회 패권은 최근 수년간 曺薰鉉(조훈현·49), 李昌鎬(이창호·27), 劉昌赫 등 3명의 공동 전유물이었고 馬曉春(마샤오춘·38), 兪斌(위빈·35), 王立誠(왕리청·44) 같은 중국인 등이 간간이 이름을 올려왔다. 사실상 「제4의 인물」로 지목됐던 李世乭이 보무도 당당하게 「우승 제도권」에 진입함으로써 지루하던 기존 판도는 급격히 출렁거릴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李世乭의 전적표를 살피다 보면 對局(대국) 수가 엄청난 데 우선 놀라게 된다. 올 들어 8월10일 현재 총 57국을 소화했는데, 이는 180여 명 한국기원 소속 기사들 가운데 단연 1위에 해당한다. 1년치로 환산하면 약 90국. 단순 계산으론 나흘에 한 판 꼴이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국내외 각종 棋戰(기전)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대국이 몰려 이틀 연속 두기도 하고, 1주일 사이 네댓 판씩 소화해 내기도 한다.
 
 
  체력은 타고난 强骨
 
 
  프로 기사들의 공식 對局 한 판에 걸리는 시간은 速棋(속기)를 제외하면 평균 일곱 시간 안팎. 초긴장 상태를 이틀 연속 유지해야 하니까 아무리 한창 나이라도 파김치가 되는 게 정상이다. 어느 중견 기사는 『연속 對局을 하다보면 정신이 멍해지면서 思考(사고)의 틀이 무너진 채 손이 관성적으로 나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외국 또는 지방 원정 對局이 끼어들면 상황은 더욱 힘들어진다. 오가는 과정의 여독과 시차로 웬만한 기사는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올해 8개월 사이 李世乭은 외국과 지방 10개 도시를 원정했다. 연간 최다 對局 기록은 1989년 李昌鎬가 수립한 111국. 하지만 지금의 페이스라면 李世乭의 금년 對局 수는 이 기록에 근접할 조짐이다. 외국 또는 지방 원정 승부도 여러 판 예정돼 있다.
 
  주목할 것은 李世乭의 체력이 이같은 강행군을 이겨낼 만큼 강하다는 점이다. 그와 대국해 본 동료들은 대부분 『비쩍 말랐어도 지구력은 타고난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고향인 전남 신안군 비금도 섬에서 자랄 때 수영으로 단련한 스태미너라는 것이다. 劉昌赫은 『世乭이와 함께 해외 원정을 몇 차례 다녀봤는데, 서너 시간밖에 안 자고도 다음날 對局 때 멀쩡하더라』고 했다.
 
  특정 기사의 對局 수가 폭주하면 본인만 괴로운 게 아니다. 한국기원에도 큰 부담이 된다. 씨줄과 날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각종 棋戰의 스케줄 짜기가 미적분 풀기보다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지난 7월 말, 李世乭이 농심杯 국가대표 선발전 준결승서 비교적 쉬운 상대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탈락하자, 기원 사업부 직원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난마같이 얽힌 스케줄에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었다.
 
  對局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활약도가 높다는 뜻이다. 많이 이기지 않으면 각종 棋戰 본선에 오를 수 없고, 본선에 오르면 도전자를 향해 또 많은 판을 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바둑계에선 기사 활약도의 지표로 승률보다 多勝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李世乭은 올해 5월 하순부터 7월 중순까지 두 달이 채 못 되는 사이 스물세 판을 두어 단 두 판만을 졌다. 그 사이엔 두 차례의 8연승이 포함돼 있다. 2000년대 초반 무려 32연승을 내달린 바 있던 李世乭에게 8연승 정도는 별 게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對局의 「質」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각종 도전기와 결승, 국제대회 등 최상급 對局의 틈바구니에서 이런 성적을 올리기란 초일류 아니면 불가능하다.
 
 
  승패는 물론 예술성도 중시
 
 
  재미있는 현상은 李世乭이 뜻밖에 連敗에도 능하다는(?) 점. 그는 금년 한 해를 새해 벽두의 4연패 포함, 3월 초까지 3승 6패의 저조한 성적으로 출발했다. 이같은 증세(?)는 7월 하순에 다시 도졌다. 이번 후지쓰杯 결승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또 다시 4연패의 수렁에 빠졌던 것. 연전의 피로감도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이 대목에서 李世乭 바둑에 대한 「기질론」이 등장한다.
 
  李世乭은 바둑의 외형적 특질로 볼 때 기세가 강한 기사로 분류된다. 기세형이란 투지와 적개심 등 심리적 변수가 유독 강한 기사를 말한다. 이 부류의 기사들은 도저히 이기기 힘들어진 바둑을 불가사의한 정신력으로 뒤집기도 하지만, 때로는 집중력을 잃은 채 장맛비에 힘없이 꺾이는 풀잎처럼 시들시들해지기도 한다. 連敗도 이같은 기분파적 기질의 소산이란 것이다. 劉昌赫, 원성진 등도 이 울타리에 포함된다.
 
  李世乭의 기질적 특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지난 7월에 발생했다. 한국과 중국의 신인왕전 우승자끼리 대결하는 韓中 신인왕전이란 연례대회 때의 얘기다. 올해 한국 신인왕은 李世乭, 중국은 彭筌(펑첸·17) 三단. 李世乭이 6월30일의 1국을 고전 끝에 역전승한 다음날, 바둑계를 온통 시끄럽게 만들었던 2국이 펼쳐졌다.
 
  결과는 백 차례인 彭筌의 불계승. 한데 종료 시점의 手數(수수)가 고작 106수에 불과했다. 大馬(대마ㆍ바둑 알의 수가 비교적 많은 경우)가 잡힐 경우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하지만 이날 흑은 어느 한 뭉텅이도 죽은 데가 없었다. 그 시점의 형세에 대해 프로들의 의견은 좀 엇갈렸지만 李世乭 우세론도 많았다. 적어도 흑이 돌을 거둘 상황은 아니란 점엔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상대인 彭筌이 자신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李世乭은 바둑이 끝난 뒤 동료, 선배들에게 『이러이러해서 흑은 고전을 피할 수 없는 형세이므로 돌을 거두는 게 당연하다』라고 극력 「해명」했다. 그런데 이 대목과 관련해 뒷날 취재과정에서 李世乭의 「본심」이 밝혀졌다. 지난 봄 새로 생긴 자신의 매형(여류 강자 이세나 아마6단의 남편으로, 그 역시 바둑계에 종사하고 있다)에게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죽기 살기로 부딪쳐 갔으면 쉽게 질 바둑도 아니었죠. 하지만 남들이 모두 짐작하는 쉬운 길로 이기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치사하게」 날뛰어야 하는 「통속적」 코스의 바둑은 두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다. 프로들 중엔 이처럼 「완벽한 그림」을 추구하는 예술가型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勝癖(승벽)이 유달리 강한 李世乭에게도 그런 성향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충분히 두어볼 만한 바둑을 포기했다는 건 자신감의 표출이지만 그 실행은 매우 어렵다. 바둑이 강해지면서 승부에도 대범해진 것이다. 오직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승부세계에서 그의 이런 측면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주목된다.
 
  李世乭의 최근 기보엔 등등한 殺氣(살기)가 느껴진다. 여차 하면 상대 大馬를 잡으러 나서는 것이다. 실제로도 초대형 大馬를 심심치 않게 낚싯대에 걸어 올린다. 李昌鎬나 曺薰鉉, 劉昌赫의 大馬도 예외가 아니다. 프로 바둑에서 大馬란 위협해서 대가를 뽑기 위한 대상이지, 잡으려고 나섰다간 죽도 밥도 안 되기 십상이다. 가뜩이나 인기 높은 李世乭이 大馬 사냥꾼으로 변신하자, 아마추어들은 『이세돌의 바둑이 組暴(조폭)화해 간다』며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프로들의 얘기는 좀 다르다.
 
  『그는 여전히 결정적 시기가 올 때까지는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최근 大馬 공격 빈도가 늘어난 것은, 수읽기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결단이 좀더 용이해진 결과물이다』(최규병 九단)
 
  이 말을 쉽게 풀이하자면 이렇다. 첫째, 李世乭의 실력이 눈부시게 향상하자, 對局 상대들은 大馬를 방치한 채 버틸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 둘째, 李世乭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아야만 할 경우가 늘어났다는 것. 셋째, 결론적으로 그의 기풍 자체가 흉폭하게 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수읽기에 확신이 없으면 大馬 섬멸 작전을 결행하는 것이 힘들다는 점에서 변화가 찾아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李世乭은 바둑계 주변에서 종종 구설수에 오르는 편이다. 구설의 내용은 대개 『나이에 비해 건방지고 예의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반대편에선 『나이가 어리다고 마구 대하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라는 반박이 즉각 튀어나온다. 사람마다 개성과 가치관, 행동규범 등이 다른 법인데 이를 인정치 않고 나이로만 윽박지르려 한다는 것이다.
 
  인기가 높다보니 그를 필요로 하는 행사가 많다. 여러 곳서 어린 나이를 약점 삼아 헐값에 교섭해 온다. 李世乭을 둘러싼 구설의 대부분은 이를 거절한 후유증들이었다. 중국 진출 건만 해도 그랬다. 중국은 1999년 도시 대항 리그를 창설, 李昌鎬, 曺薰鉉, 劉昌赫 등 소위 「3인방」까지 연간 몇 판씩 참여시키고 있다. 그 중 한 팀이 李世乭에게도 손을 뻗어왔다. 지난해의 이야기인데, 李世乭은 매니저 격인 친형 李相勳(이상훈) 四단과 의논 끝에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다.
 
 
  『내가 세계 最强인 것 같다』
 
 
  당시 제시된 액수는 10만元으로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1500만원 정도. 李相勳 四단은 『타이틀 보유자에 대한 합당한 대우 없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헐값에 교섭해 온 데 기분이 상했다』고 회상한다. 이때도 『李世乭이가 벌써 돈맛을 알아서 거액을 요구하다가 중국 진출이 무산됐다』는 얘기가 돌았다.
 
  언행이 약간 튀는 것은 사실이다. 직선적인 말투가 종종 오해 또는 편견을 불러오곤 한다. 그러나 솔직함과 당당한 감정 표현은 N세대니 월드컵 세대니 하는 이름의 이들 20세 전후 젊은이 집단에겐 공통적 현상이다. 그 간격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李世乭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같은 괴리의 원인이 어디서 오는지 웬만큼은 감지된다.
 
  「히카루의 바둑」이란 만화가 있다. 일본에서 수십만 부가 팔렸다는 베스트셀러로, 한국에서도 「고스트 바둑왕」이란 이름으로 출판돼 역시 대박을 터뜨리는 중이다. 이 만화에는 「사이」란 이름의 「바둑 귀신」이 등장한다. 일본서 역대 최강의 기사로 꼽히는 本因坊 秀策(본인방 수책)으로 환생하기도 했던 「사이」와 대결한다면 이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李世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당시엔 초읽기 제도도 없었잖아요?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도 그 정도 수준이라면 까짓거 문제없어요』
 
  李世乭에게 누가 지구상 최고수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역시 진지한 표정과 함께 『실제론 내가 최강인 것 같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바둑은 내가 이기면 실력, 지면 실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속성을 지닌 게임이다. 정상권 언저리의 기사들 대부분이 속으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李世乭은 그들 누구보다 솔직한 것이다. 위선적 겸양보다는 진실된 오만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李世乭은 세계 정상의 일각을 차지한 지금까지도 고작 三단에 불과하다. 프로 기사들의 승단은 승단대회 성적을 통해서만 이뤄지는데, 李世乭은 1년이 넘게 승단대회에 불참하고 있다. 이 점도 일부로부터 「씹히는」 소재가 된다. 젊은이가 성적 좀 낸다고 너무 중뿔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미 고단자의 대열에 오른 기득권자들로선 李世乭 같은 低段 高手가 많아지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둑계에서 단위가 일종의 액세서리로 전락한 지 꽤 오래됐다. 실력과 단위가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겉치레」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는 월드컵 세대의 李世乭이 승단대회에 불참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선택인지 모른다. 그는 승단대회를 포기했는데도 최다 대국 1위로 나선 채 스케줄 폭주에 허덕이고 있다.
 
 
  형제간의 友愛 각별
 
 
  李世乭은 3남2녀 가운데 막내다. 지난해까지 왕십리 전셋집서 살았던 이들 가족은 현재의 마장동 집으로 옮겼다. 거금 3억 1000만원짜리다. 상당액을 은행 대출에 의존하긴 했지만, 주택구입 자금의 대부분을 李世乭이 해결했다. 그의 지난해 연간 상금수입은 1억5000만원. 이 액수는 李昌鎬, 曺薰鉉, 劉昌赫에 이은 서열 4위에 해당했다. 막내의 눈부신 대활약 덕분에 가족들의 오랜 「내 집」 염원이 달성된 것이다.
 
  이사하면서 둘째 누나 세나씨만 결혼과 함께 분가, 군자동에서 살고 있다. 큰형 李相勳 四단이 지난 봄 개업한 어린이 바둑교실 근처다. 마장동 집의 살림은 아직 미혼인 첫째 누나 상희씨 몫이다. 世乭은 그녀에게 대국료 수입을 몽땅 건네고, 매달 용돈을 타서 쓴다. 이번 후지쓰杯 우승 상금이 무려 2억원이나 되니, 아마도 지난 연말 이사할 때 끌어다 쓴 은행융자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족의 형제애는 유별나 보인다. 世乭의 바둑 인생 중 절반은 같은 프로 기사로 「동업자」 격인 큰형 李相勳 四단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동생이 중요한 판을 져 괴로워하면 형은 막내를 언제나 따뜻이 위로해 주곤 했다. 심지어는 李世乭이 미성년자 시절, 술을 배운 것도 이 「큰형」에 의해서였다. 世乭은 요즘 담배도 좀 피운다. 하지만 폭음, 폭주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가족들이 이 소중한 막내를 충분히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새로 생긴 매형을 포함한 전 가족이 나이트 클럽에 진출했다. 입장하려는데 기어코 世乭이가 잡혔다. 우리 나이론 20세지만 그는 아직 變聲(변성)도 안 됐다. 얼굴은 또 얼마나 앳돼 보이는가. 형과 누나, 매형들이 쭈빗쭈빗 철수하려 할 때 世乭이가 앞으로 썩 나서더니 뒤춤에서 마치 쌍권총 뽑아들듯 무언가를 꺼냈다. 주민등록증이었다. 그들 가족은 그날 저녁 퇴장당하지 않고 모처럼 유쾌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것만 피한다면, 世乭은 누구보다 평균적인 「보통 사람」인지 모른다.
 
 
  국내 3强과 대등한 실력
 
 
  고향 飛禽島(비금도)엔 이들의 어머니(54)가 농사를 지으며 혼자 살고 있다. 이번 후지쓰杯 원정 때는 『부담 갖지 말고 잘 다녀오라』는 엄마 전화에 世乭은 『걱정마, 문제없어』하곤 자신감과 응석이 범벅된 답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飛禽島라면 世乭이 불과 다섯 살 때, 지금은 타계한 교육자 출신 아버지로부터 처음 바둑을 배웠던 곳이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바둑 유학」차 상경하면서 이곳을 떠났다. 世乭은 해마다 명절 때면 형, 누나들과 함께 엄마와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함께 기다리는 고향을 찾는다.
 
  프로 기사로서 李世乭의 종착역은 어디 쯤일까.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기사도 李世乭을 한 수 아래라고 얕볼 수 없는 경지까지 올라섰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3인방으로 통하는 최강 그룹과의 상대 전적도 당당하다. 李昌鎬에겐 7승11패로 추격 중이고, 劉昌赫과의 간격은 10승12패로 좁혔다. 曺薰鉉에겐 데뷔 초 5연패 후 내리 7연승으로 이미 승률에서 앞서기 시작했다.
 
  李世乭에게도 天敵(천적)은 있다. 아직 睦鎭碩(목진석·22) 六단에게 6승12패, 崔明勳(최명훈·27) 八단에겐 3승6패로 뒤진 상태다. 安永吉(안영길·22) 四단에게도 3연패 후 간신히 1승을 올렸다. 이 자료들은 최고의 자리를 향한 길이 어느 만큼 험로인지를 암시한다. 李世乭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세 살 이내 젊은 梟雄(효웅)들의 유망주 숫자는 거의 30명을 헤아린다. 李世乭 스스로도 朴永訓(박영훈·17), 崔哲瀚(최철한·17), 元晟溱(원성진·17) 등 후배 유망주들과 대국할 때, 『훨씬 큰 부담감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李世乭의 재주에 관해 인색하게 평가하는 선배는 하나도 없다. 李昌鎬 九단은 수년 전부터 『전투력이 뛰어나고 감각과 수읽기가 좋다』며 자신을 추격할 선두주자로 李世乭을 꼽았는데 요즘 그 말이 적중해 가고 있다. 「리틀 조훈현」이라고 불리는 李世乭에 대해 曺薰鉉 자신의 평가는 이렇다. 『나하고 닮은 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변화를 즐기고 대처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일 텐데, 어쩌면 나보다 윗길인지 모르겠다』 또 李世乭의 「天敵」이라는 睦鎭碩은 『매번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언젠가부터 速棋의 경솔함에서 벗어나더니 요즘엔 정말 두려운 후배임을 깨닫게 하곤 한다』고 했다.
 
 
  국제대회를 제패한 최연소 棋士
 
 
  李世乭의 速棋 능력은 정평이 나 있다. 그냥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고 정확하다. 최근 잦아진 「大家」들과의 대결서 그는 「手」와 함께 「시간」으로 번번이 재미를 보았다. 劉昌赫을 꺾고 배달왕 타이틀을 따냈을 때, 후지쓰杯 준결승서 李昌鎬의 대마를 잡고 이겼을 때, 그리고 曺薰鉉과 난타전을 펼친 거의 대부분 판이 이런 호흡 속에서 진행됐다. 한창 진행 중인 왕위전 4국서도 이런 초식으로 2대 2의 팽팽한 접전을 펼쳐 패권을 기어이 최종 5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
 
  李世乭의 각종 기록을 정리해 본다. 그는 12세 4개월의 나이에 프로가 됐는데 이는 최연소 입단 부문 역대 5위에 해당한다. 또 제2회 LG杯 때 14세 3개월의 나이로 본선에 올라 李昌鎬(13세 9개월·2회 후지쓰杯)에 이어 국제대회 최연소 출전 부문 역대 2위를 마크 중이다. 국제대회 최연소 우승 부문에선 이번 후지쓰杯 제패(19세 5개월)로 李昌鎬(16세 6개월·제3회 동양증권杯)에 이어 사상 두 번째 10大 챔피언으로 등록됐다.
 
  국내 최연소 우승 부문 또한 李昌鎬(14세 1개월·제8회 바둑왕전) 다음인 역대 2위(17세 9개월·제5회 천원전). 이밖에 최다 연승 부문은 李昌鎬(41연승) 金寅(40연승)에 이어 역대 3위(32연승)이고, 최저단 우승은 徐奉洙(二단)에 이은 2위다.
 
  李世乭이 1위로 나선 부문도 있다. 국제 대회 최저단 우승이 그것. 이번 후지쓰杯서 三단의 몸으로 세계를 정복, 五단 시절 동양증권杯를 차지했던 李昌鎬를 앞질러 버렸다.
 
  李世乭은 요즘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다. 아버지 역할을 하는 여덟 살 위의 형 李相勳 四단은 『아마도 또래 동료기사들과 어울려 PC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즐기다가 들어오는 것 같다』고 짐작한다. 당구도 가끔 친다. 아무리 젊다지만 이쯤되면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世乭은 대국이 없는 날이면 새벽에 잠들어 다음날 오후 3, 4시에 일어날 만큼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곤 가끔 혼자 여행을 다녀온다. 어디로 가는지, 가서 무얼 보고 오는지 집에선 묻지 않는다. 하지만 치열한 승부에 항상 부대껴야 하는 프로들에게 여행이란 사색과 재충전을 위한 좋은 처방일는지 모른다. 얼마 전엔 느닷없이 『베트남에 갔다 오겠다』고 선언해 식구들이 말리느라 혼이 났다고 한다. 바둑판을 벗어나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평균 신세대」 李世乭. 이 젊은 영웅이 앞으로 盤上(반상)에서 또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며 새 신화를 축적해 갈지 조용히 지켜볼 일이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910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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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사이 관련 어록의 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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