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爱相杀
2001년과 2002년, 이창호 9단과 이세돌 3단은 연속 격돌했다. 두번 모두 혈전이었다. 종가(宗家)의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었다. 승부가 끝난 현장은 다 타버린 재와 같았다. 이창호는 두번 다 이겼고 이세돌은 두번 다 졌다. 이세돌은 비록 졌으나 내용은 충실했다. 돌부처라 불리는 이창호조차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승부였기에 패자 이세돌의 가슴은 더욱 쓰라렸다. 상처가 깊었다. 세월은 잿더미 속에서도 생명을 키워낸다. 이세돌은 훨씬 성숙한 20세 청년이 되어 다시 이창호 앞에 나타났다.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컵을 놓고 두사람의 천재가 다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21세기의 첫해에 시작된 두사람의 대결은 신기하게도 매년 한번씩 이루어..
후지쯔배 우승을 차지한 구리 9단이 부친의 묘소를 찾은 기사가 중국 인터넷에 실리면서 많은 바둑팬들의 격려와 잔잔한 감동을 낳았다. 아래 내용은 중국 시나닷컴에 난 기사를 옮겼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벌써 435일이 흘렀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바램을 져버리지 않고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후지쯔배 우승을 차지한 구리 9단이 지난 7월 10일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후지쯔배 우승이 확정된 날 구리 9단은 부친을 생각하니 목이 메이고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7월 10일 충칭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공항에서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갈 때 구리 9단은 붉은 색 T셔츠를 입고 있어 집에 들른 후 구리는 곧 검은 색으로 갈아입고 부친의 묘소를 찾은 것. 구리 9..
이수오(李壽五)씨는 기인(奇人)이었다. 바둑천재 이세돌의 아버지인 그는 44년 생으로 광주교대를 나왔다. 젊은 시절 목포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식솔들을 이끌고 고향인 비금도(飛禽島)로 유턴, 98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아마 5단의 바둑실력과 함께 천문, 역사, 족보 등에 두루 해박한 인텔리였다. 말년의 그는 막내 세돌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 3남 2녀의 자녀 모두를 도시로 진출시키고 유일하게 세돌이만 곁에 남긴 채 바둑을 가르쳤다. 그의 바둑 교육방식은 특이했다. 아침에 농사일을 보러 나가기 전 사활(死活)문제를 내주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 숙제를 점검하는 식이었다. 전직 교사이자 현직 농부였던 이수오씨의 막내사랑은 끔찍했다. 다섯 살 막내동이가..